선사 및 고대
선사 및 고대
은평구 지역에서 인류가 문화생활을 시작한 것은 역사시대 이전으로 추측된다.
선사시대부터 은평구의 일부지역에서는 혈연을 같이 하는 씨족끼리 취락을 이루어 집단생활을 하였는데, 움집 같은 곳에 기거하면서 농경과 수렵, 어로활동을 통하여 음식물을 구하고 원시적인 방직술을 습득하여 간단한 직물을 짜 입기도 하였다.
현재는 은평지역에서의 농경기록이 거의 없어 그 구체적 실상을 파악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지역에서 멀지 않은 연천군 전곡리에서 구석기인의 삶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최근 일산신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신석기인의 대규모 유적이 발굴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이 지역도 일찍부터 선사인의 삶의 터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B.C. 1천년 또는 B.C. 7백년 경부터 청동기가 들어와 사용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는데, 이 시대에는 청동제의 칼과 화살촉, 도끼 등이 사용되지만 농기구는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곧 정복전쟁에는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였으나 농업에는 주로 석재 농기구를 사용한 것이다. 주거 형태는 대개 움집 형태이며 무덤은 고인돌 곧 지석묘와 석관묘가 대부분이고 적석총이나 옹관묘를 쓰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청동제 무기에 의한 이웃 정복이 시작되었으므로 여기서 부와 권력을 가진 군장이 등장하였고, 이에 따라 부족국가, 성읍국가, 군장국가가 생겨나게 된다. 부족국가로서 한강유역(서울지역)에는 처음 진국(辰國)이 있었으며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을 통하여 철기문화가 보급되고 사회가 점점 발전하면서 지역연맹체로서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시대가 열렸다.
은평이 위치한 한강 하류 유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이 서로 통 제,수비하던 군사적 요충지이며, 이러한 영토의 중요성 때문에 삼국의 세력이 늘 충돌하던 격전지였다. B.C. 18년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고 북한산의 인수봉, 백운봉에 올라 이곳을 나라로 세울 땅으로 살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후 백제는 북한산 아래 하북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이러한 백제의 역사적 사실들은 은평구와 주변지역에서 발굴된 토기 등으로 증명되고 있다. 이후 백제는 문주왕때 공주로 남천할 때까지 493년간 한강유역을 통치하였다.
고구려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면서 남하정책을 추진하자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서 격돌할 수밖에 없었다. 427년 장수왕 때에는 도읍지를 만주 압록강변 중류의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백제 개로왕 21년(475년),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한강유역(서울지역)은 고구려의 세력하에 들어갔다. 이후 고구려는 한강 유역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는 한편 백제 개루왕(132년)때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명명했던 북한성에는 남평양을 두어 별도(別都)를 삼았다. 그 후 한강 유역은 76년간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자 신라와 백제는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동맹관계를 맺고 고구려를 쳐서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가 동맹을 깨뜨림으로써 한강 유역은 백제로 귀속된지 2년만에 신라의 땅이 되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는데, 6세기 중엽에는 신라가 진흥왕의 주도하에 이 지역을 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다. 553년에는 신라의 영토가 되어 신라의 주현(州縣)을 설치하고 이름을 신주(新州)라 불렀으며, 그 후 서기 668년 신라의 삼국통일이 완성되어 통일 후 신라는 전영토를 9주로 나누었으며 북한산역(서울)을 포함하는 한강 하류지역을 9주의 하나인 한산주(漢山州)라 고치고 남진정책의 발진기지로 삼았다. 그 후 서울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여 한양이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은평구 지역은 고대 국가시대부터 교통의 길목으로써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한강 하류지역으로써 전략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생산의 장으로서 그리고 문화의 요람으로서 주목되고 있었다. 한반도 동북쪽은 산악지대였을 뿐 아니라 문화적,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어서 당시 남과 북을 연결해주는 길은 거의 이 지역을 통과하는 길 뿐이었다. 이 지역은 남에서 북으로, 또는 북에서 남으로 오가는 상인, 관리, 학자, 승려,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붐볐다. 대륙의 문물이 한반도에 전해진다고 할 때, 그것은 주로 서북쪽에서 압록강을 건너 청천강, 대동강 하류를 지나 한강 유역에 이르는 것이 일반적 경로였다. 한반도 동북쪽은 산악지대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사람의 거주지는 많지 않았고, 그들의 왕래도 많지 않았다.
압록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왕래함에 있어서도 의정부ㆍ동두천 방면으로 해서 서울의 동쪽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지만, 거리가 멀 뿐 만 아니라 지형조건으로 보아도 통행에 불편하였다. 따라서 평양,개성에서 서울로 오자면 장단, 파주를 거쳐 일산방면 또는 벽제방면으로 나뉘어 은평구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은평구 지역은 일찍부터 교통의 길목으로 중요시되었다. 고대시기에 한강 유역은 진성여왕때 궁예가 침입하여 태봉국의 영토가 되기까지 342년간 신라의 영토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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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최종수정일2022.01.23